[2021] 밀리그램디자인 조명민 대표

작성자 : SUPER PM | 조회수 52746 | 등록일 2022-04-13



첫아이와의 만남




음악을 전공한 저는 음악 활동을 하며 큰 어려움 없이 성장했습니다. 결혼 적령기가 되자 중매로 유학 중인 남편과 결혼을 하고 바로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다음 해 첫 아이를 출산했는데 건강하고 똘망똘망한 아이였습니다. 외국에 살다 보니 언어 발달이 약간 늦었으나 친구에게 관심이 많은 아이였습니다. 두 번의 생일이 지나고 당시 83세이시던 시아버지의 호출로 급하게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가족이 입국한 지 딱 한 달 만에 시아버지께서는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습니다. 처음 겪는 큰 일이라 경황이 없었습니다. 둘째 출산이 얼마 남지 않아 큰아이를 아파트 1층에 있는 놀이방에 보냈습니다. 뭐든 꾸준하게 하는 걸 좋아했던 나는 아이가 싫어하는데도 왜 싫어하는지 살피지도 않고 계속 놀이방에 보냈습니다. 급기야 놀이방에서 머리가 찢어지는 사고가 생겼고 아이는 한 달이 지나지 않아 급 퇴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아이들




큰 아이의 자폐성 장애진단으로 인한 좌절




눈은 초점을 잃었고 발화도 전혀 없는 아이, 동물인지 사람인지 구분할 수 없는 행동을 보고 있으니 좌절감과 죄책감으로 헤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나의 우울감은 심각한 수준에 달했습니다. 우울증으로 인해 나도 모르게 아파트 창문 밖으로 몸을 던지기 위해 뛰어가는 나를 가족들이 잡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것입니다. 가족들의 도움으로 우울감에서 빠져나와 제대로 아이의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소아 신경정신과를 찾아갔습니다. 자폐성 장애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무지




자폐성 장애가 뭐지? 아이의 상태에 관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치료를 위해 정보를 모으고 종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치료실에 아이를 밀어 넣고는 냉기가 감도는 삭막한 복도에서 어린 둘째와 기다리기를 반복하며 집으로 돌아올 때면 지쳐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을 정도로 탈진 상태가 되었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갑자기 퇴행했으니 1년만 치료를 열심히 하면 빠르게 회복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차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2년, 3년 동안 전력 질주를 하듯 치료에 매진해도 아이의 상태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자폐성 장애는 운동경기에 비유하면 마라톤이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조금 좋아지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초등학교에 입학시키고 복도에 하루 종일 서 있겠다는 다짐으로 학교에 함께 등교했는데, 담임 선생님께서 집으로 가라고 하면서 학교에서 생기는 일은 알아서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인복 많은 아이는 좋은 선생님을 만나며 학교생활을 했습니다.




병을 이기기 위한 도전




24시간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 나만의 시간이 생기니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 불안하였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친정아버지는 옷 한 벌 사서 입고 아버지 회사에 나와 앉아 있기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음악이 아닌 경제활동은 처음이었으나 아버지의 후광을 등에 업고 활발한 회사 생활을 했습니다. 내성적이고 소심한 나에게 사업가 기질이 있다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기발한 마케팅으로 매출은 쑥쑥 올랐습니다. 그때 갑자기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아이를 데리고 다니던 치료실과 내가 앉아 있던 삭막한 복도였습니다.

치료실 복도는 춥고 하얀 벽에 장식하나 걸려 있지 않았습니다. 오래된 동화책, 치료실 안내지 정도가 구비되어 있었습니다. `아이를 기다리는 40분 만이라도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면 얼마나 좋을까? 치료실도 아무 교구나 아무 교재로 가득 찬 공간이 아니라 정리 정돈되고 치료에 맞게 꾸며진 공간이면 아이가 얼마나 즐거울까?` 이 두 가지 생각으로 실내디자인학과에 입학 서류를 등록하는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20대 동기들과 학부 수업을 듣다가 대학원으로 진학을 하면서 본격적인 치료실 환경에 관한 연구가 시작되었습니다.




아이를 위한 연구




늦은 나이에 공부하려니 머리에 들어가지도 않고 컴퓨터도 전혀 모르는 상태라 건축도면을 그리는 거의 모든 수업은 다른 학생들에게 민폐였습니다. 틈틈이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가면서 동기들에게 보충수업을 받았습니다. 치료환경에 대한 논문을 쓰기 위해 실제로 발달장애 치료실인 `아이존` 한 곳을 전체 리모델링하고 이용자인 발달장애인에게 리모델링 전과 후에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관찰 내용을 통계 분석하여 `‘자폐성 장애아동의 치료환경에 대한 감성 공학적 접근에 관한 연구’` 라는 제목으로 최우수 논문상을 받으며 졸업을 하였습니다. 이어서 4개의 논문을 계속 게재하였습니다. 하지만 만족스럽지 않은 찝찝함이 마음 한구석에 있었습니다. 사회복지학과에서 보는 치료실 환경은 어떤 것인지 궁금해서 사회복지대학원에 입학했습니다. 공부라기보다는 반성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장애인 당사자의 자기 결정권이라는 주제에서 유레카를 외치며 찝찝함의 원인을 알아냈습니다.

발달장애인의 환경을 연구한다고 하면서 발달장애인에게 직접 물어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물어보면 정확한 대답을 할 수 있는 발달장애인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실험의 수단으로 뇌파 실험을 선택하여 색채, 조명, 색온도에 관한 뇌파 실험을 계속 진행했습니다.


박람회






창업




발달장애인의 환경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다 보니 `같은 연구를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불모지였던 발달장애인의 환경이 양적 서비스에서 질적 서비스로 바뀌기 시작하면서 발달장애인의 물리적 환경에 대한 문의가 늘어났고 설계를 도와드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직접 공사까지 진행해 줄 수 있겠냐는 의뢰를 받고 창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무섭고 두려웠습니다. 사무실을 빌리고 직원들이 생기고 고정비용이 생기면서 일을 만들어서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재)여성기업종합지원센터와 여성경제인 DESK 전문위원




회계, 인사, 재고 관리 등 모르는 업무로 앞날이 까마득했습니다. 정보를 수집했고 도움이 간절했습니다. 중소기업지원 정책정보를 집중적으로 파헤치다 보니 여성 대표가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여성기업 등록이었습니다. 여성기업으로 등록하면 공공기관 공사를 포함하여 제품을 우선 구매하도록 의무화되어 있어서 수주하는데 유리한 입장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원사업 시 가산점이 부여되는데 실적이 별로 없는 창업기업에게는 소중한 점수였습니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컨설팅 외 공간지원도 있었지만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습니다. 여성기업으로 등록이 되자 (재)여성기업종합지원센터에서 여성창업경진대회 모집 공고가

있으니 지원해 보라는 안내를 받아 신청을 하게 되었고, 우수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많은 매체에서 인터뷰하고 라디오, 방송에도 출연하게 되면서 회사의 인지도가 수직상승 하기 시작했습니다.

인지도가 올라가고 업무가 복잡해질수록 회사 경영은 어려웠습니다. 그러던 중 구세주처럼 여성경제인 DESK 전문위원을 만나게 되어 2년 동안의 지원사업을 정리해서 A3 종이 한 장을 건네주었습니다. 형광펜으로 표시해 가면서 도움 받아야 하는 지원사업을 중요한 순서대로 표시하고 지원신청서를 작성해서 문턱이 닳도록 (재)여성기업종합지원센터를 드나들며 DESK 전문위원을 찾아갔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허접하기 짝이 없는 내용이었을 텐데 다른 부서 사람들까지 동원해서 제가 작성한 사업계획서를 검토해주시고 프레젠테이션 예행 연습까지 하면서 지적을 해주었습니다. 연예인이 되어본 적은 없지만, 연예인 기획사 연습생들이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여성기업의 기획사 역할을 해준 DESK 전문위원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영에 부족한 부분은 멘토로 채워주었고 지원사업으로 사업비를 지원을 받으며 성장할 수 있도록 든든한 디딤돌이 되어주었습니다.




심리안정실, 스누젤렌




발달장애인의 물리적 환경의 문제점을 개선하려는 소셜 미션으로 사회적기업 육성사업 최우수 기업으로 평가받으며 사회적기업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사업개발비, 연구비, 인건비 등 다양한 방법으로 지원받으며 발달장애인뿐만 아니라 유니버설디자인에 대한 연구와 연구한 디자인을 적용 가능한 곳에 실내디자인을 하고 공사를 하다 보니 아이가 어린 시절부터 치료를 위해 다니던 치료실의 곳곳을 살피고 디자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스누젤렌 치료라는 것을 접하게 되었는데, 첫 느낌은 오묘한 분위기에 신기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스누젤렌실은 오감 자극을 통해 심신 이완에 목적을 둔 치료실이었습니다. 네델란드에서 연구가 시작되어 지금은 독일에서 많은 연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실태조사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많은 곳에 스누젤렌실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대략 10평 정도 되는 곳에 설치하는데 수 천만 원이 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유익한 치료임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곳에서 이용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상당히 큰 기계 소리가 나는데 해외 제품이라 수리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해외 수입에 100%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순간 `한번 만들어볼까?` 하는 제품개발에 대한 무지에서 온 용감한 생각이 씨앗이 되어 치료 도구를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개발을 시작한 지 2년이 지난 지금은 국내 특허, PCT까지 나왔지만, 다시 2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개발에 손도 대지 않을 것입니다. 그만큼 힘든 작업이었습니다. 지금은 해외에서도 시도하지 않은 통합시스템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좋은 성과로 계속 발전해 나가고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치료 도구를 만들고자 합니다.




전화위복




장애인, 노인뿐만 아니라 코로나19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 제가 개발한 심리안정 도구가 잘 활용되기를 바랍니다. 처음 아들이 장애 진단을 받을 당시가 다시 생각납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하여 나에게 이런 벌을 주시나?` 하는 쓸모없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그때를 잘 극복하고 축복 같은 나의 아들로 인해 많은 사람에게 이로운 일을 할 수 있게 되어 아들에게 감사하고 가족들에게 감사합니다.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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